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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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데하라 기주로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1872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51년 사망했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1920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국제 협조 노선인 '시데하라 외교'를 추진했으나, 만주사변으로 인해 외교 노선은 종언을 맞이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에는 초대 총리로 임명되어, 일본국 헌법 제정에 관여했으며, 특히 헌법 9조의 전쟁 포기 조항 발안자로 거론되지만, 이에 대한 논란이 있다. 총리 퇴임 후에는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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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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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종일위 남작 |
이름 | 시데하라 기주로 |
출생일 | 1872년 9월 13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사카이현맛타군 가도마 (현재의 오사카부가도마시) |
사망일 | 1951년 3월 10일 |
사망지 | 도쿄도 세타가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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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학교 | 제국대학 법학부 |
정치 경력 |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945년 10월 9일 ~ 1946년 5월 22일 |
국왕 | 쇼와 천황 |
전임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 |
후임 | 요시다 시게루 |
직책 | 중의원 의장 |
재임 기간 | 1949년 2월 11일 ~ 1951년 3월 10일 |
국왕 | 쇼와 천황 |
전임 | 마쓰오카 고마키치 |
후임 | 하야시 조지 |
직책 |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
재임 기간 | 1930년 11월 14일 ~ 1931년 3월 10일 (대리) |
국왕 | 쇼와 천황 |
전임 | 하마구치 오사치 |
후임 | 하마구치 오사치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오사카 3구 |
재임 기간 | 1947년 4월 26일 ~ 1951년 3월 10일 |
직책 | 귀족원 의원 |
재임 기간 | 1926년 1월 29일 ~ 1947년 4월 25일 |
직책 | 부총리 |
내각 | 제1차 요시다 내각 |
재임 기간 | 1947년 5월 3일 ~ 1947년 5월 24일 |
직책 | 초대 복원청 장관 |
내각 | 제1차 요시다 내각 |
재임 기간 | 1946년 6월 15일 ~ 1947년 5월 24일 |
직책 | 초대 제1 복원대신 및 제2 복원대신 |
내각 | 시데하라 내각 |
재임 기간 | 1945년 12월 1일 ~ 1946년 5월 22일 (총리 겸임) |
직책 | 외무대신 |
내각 | 가토 다카아키 내각, 제1차 와카쓰키 내각, 하마구치 내각, 제2차 와카쓰키 내각 |
재임 기간 | 1924년 6월 11일 ~ 1927년 4월 20일, 1929년 7월 2일 ~ 1931년 12월 13일 |
소속 정당 | |
소속 정당 | 무소속, 동화회, 일본진보당, 일본민주당, 무소속/동지클럽, 무소속/민주클럽, 민주자유당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시데하라 마사코 |
자녀 | 장남: 시데하라 미치타로, 차남: 시데하라 시게오, 삼남: 시데하라 헤이조 |
친족 (정치가) | 이와사키 야타로(의부), 시데하라 다이라(형), 가토 다카아키(의형), 기우치 주시로(의형) |
훈장 및 학위 | |
훈장 | 종일위,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
학위 | 법학사 (제국대학, 1895년) |
2. 생애
시데하라 기주로는 1872년 9월 13일 오사카부 가도마시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1]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896년 대한제국 인천(Chemulpo) 주재 영사 파견을 시작으로 여러 해외 공관에서 근무했으며, 1903년 미쓰비시 재벌 창업 가문의 이와사키 마사코와 결혼했다.[2][3]
1915년 외무차관, 1919년 주미대사를 역임하며 워싱턴 군축 회의에 참여했고,[1] 1924년부터 여러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내며 국제 협조 노선을 추구하는 '시데하라 외교'를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5년 10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전후 처리와 일본국 헌법 제정 과정에 관여했다. 총리 퇴임 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1949년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1년 의장 재직 중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외교관 경력
시데하라 기주로는 1872년 9월 13일(메이지 5년 8월 11일) 오사카부 가도마시의 부유한 농가(豪農)에서 태어났다.[1][5] 그의 형인 시데하라 탄은 교육행정가이자 타이호쿠 제국대학(현재의 국립 타이완 대학) 초대 총장을 지냈다. 시데하라는 구제 제3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895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에서는 호즈미 노부시게의 지도를 받았으며, 훗날 총리가 되는 하마구치 오사치와는 제3고등학교 및 제국대학 동기였다.
대학 졸업 후 잠시 농상성에 근무했으나, 이듬해 1896년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무성으로 옮겼다. 같은 해 한국의 인천(당시 제물포) 주재 영사로 파견되었고,[1] 이후 런던, 안트베르펜(벨기에), 부산 영사관, 워싱턴 D.C. 및 런던 대사관 참사관, 네덜란드 공사 등을 역임했다.
1903년 미쓰비시 재벌 창업 가문 출신인 이와사키 마사코(岩崎雅子)와 결혼했으며,[2] 이를 통해 훗날 총리가 되는 가토 다카아키의 처남이 되었다.[3]
1915년 일본으로 돌아와 외무차관으로 임명되어 5개 내각에 걸쳐 그 직책을 유지했다.[1] 1919년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대통령 워런 G. 하딩의 제창으로 열린 워싱턴 군축 회의(1921-1922)에서 일본 측 전권위원으로 참여하여 주요 협상가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협상을 통해 산둥반도의 교주만 조차지가 중국에 반환되는 성과를 거두었다.[1] 그러나 그가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일본인에 대한 차별적인 이민법이 제정되어 일본 내 많은 악감정을 불러일으켰다.[1]
1920년 화족 제도 하에서 남작 작위를 받았고,[1] 1925년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1]
2. 2. 외무대신 시절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처음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와카쓰키 내각(1차, 2차), 하마구치 내각 등 입헌민정당 계열 내각에서 외무대신직을 이어갔다.당시 일본 내 군국주의 세력이 부상하는 상황에서도, 시데하라는 국제 협조 노선을 견지하며 영국 및 미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와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원칙을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외교 정책은 시데하라 외교로 불리며, 군부 중심의 팽창주의적 '다나카 외교'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제국 의회 첫 연설에서 국제 연맹의 원칙 준수를 약속하기도 했다.
시데하라의 중국 정책은 내정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조약상의 권익 옹호에는 적극적이었다. 1925년 10월 베이징 관세 회의에서는 중국의 관세 자주권 요구에 합의를 추진했으며, 1926년 장제스의 북벌 당시에는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1925년 5·30 사건 때는 중국 내 일본계 공장 파업에 대해 봉천군벌 장쉐량에게 요청하여 무력 진압을 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난징 사건 발생 시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의 외국 영사관 공격에 대한 열강의 보복적 최후통첩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난징 사건 등을 계기로 군부와 정우회, 심지어 각료 내부(우가키 가즈나리 육군대신 등)에서도 시데하라 외교에 대한 비판이 커졌고, 이는 1927년 4월 제1차 와카쓰키 내각 붕괴의 한 요인이 되었다.
1929년 하마구치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으로 복귀하여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나, 이는 군부로부터 '연약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마구치 총리가 1930년 총격으로 중상을 입자, 1931년 3월까지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를 맡기도 했다.[7] 이 기간 동안 야당 입헌정우회로부터 비당원인 시데하라의 총리 대리직 수행과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 과정에서의 발언(천황에 대한 책임 전가 문제)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8]
1931년 여름, 광저우 국민 정부의 외교부장 천유런이 방일하여 만주를 일본이 임명하는 정권 하에 두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시데하라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중국에 대한 불간섭 정책은 파탄났고, 사건 수습에 실패하면서 시데하라 외교는 종언을 고했다. 이는 일본에서 문민(文民) 외교가 끝나고 군부가 주도하는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10월, 시데하라는 "평화와 전쟁의 일본인(Japanese Man of Peace and War)"이라는 설명과 함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다.[4]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도 알려졌는데, 이름 발음을 헷갈려하는 미국 기자에게 "나는 히(He)-데하라, 아내는 시(She)-데하라"라고 재치있게 답한 일화가 있다.
만주사변 이후 시데하라는 사실상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 귀족원 의원으로 지냈다.
2. 3. 총리대신 시절


1945년 일본의 항복 당시 시데하라 기주로는 사실상 은퇴 상태였으나, 친미적인 성향 덕분에 1945년 10월 9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1946년 5월 22일까지 재임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일본의 첫 총리였다. 총리직과 함께 진보당(新進党) 총재직도 맡았다.
본래 시데하라는 총리직 지명을 꺼려 이사 준비까지 하고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지명을 고사했던 요시다 시게루의 격려[11]와 쇼와 천황의 직접적인 설득 등으로 정계에 복귀했다.[10] 당시 정계에서는 잊힌 인물이었으나, 친영미파로서의 인맥을 활용하여 활동했다.
1945년 10월 11일, 시데하라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예방했다.[12]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포츠담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인권 확보를 위한 개혁 실시, 동절기 대책 마련 등을 요구했다.[13] 시데하라 내각은 맥아더의 지침에 따라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비공식 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이 초안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일본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 특히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일본 헌법 제9조는 시데하라가 처음 제안했다는 주장이 있다. 맥아더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이를 언급했으며, 시데하라 본인도 회고록 『외교 50년』(外交五十年, 1951)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해당 구상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그는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부터 국제법과 헌법에서 '전쟁 금지' 개념을 접했다고 한다. "세계 인류(sekai jinrui)와 함께 전쟁 없는 세상(sensō naki sekai)을 만들어 갑시다"라는 그의 말은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다. 그러나 제9조의 실제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시데하라 내각은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고, 미쓰비시 재벌과의 가족적 유대 관계 등으로 인해 좌파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46년 4월 10일 치러진 전후 첫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이 제1당이 되자 시데하라 내각은 총사퇴했다. 후임 총리로는 요시다 시게루가 취임하여 제1차 요시다 내각이 발족했다.
2. 4. 총리 퇴임 이후
구 헌법하의 마지막 총선거이자 전후 최초의 총선거인 1946년 4월 10일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이 제1당이 되면서 시데하라 내각은 총사퇴했고,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출범했다. 시데하라 기주로는 이 내각에 무임소 국무대신으로 입각했으며, 이후 복원청 총재를 겸임했다.
1947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18] 이후 일본진보당 총재를 맡았고 민주당 결성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가타야마 내각의 사회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다나카 각에이, 하라 겐자부로, 혼마 슌이치, 나카야마 마사, 고다이라 히사오 등 자신을 따르는 젊은 의원들과 함께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19] 내각총리대신 경험자가 중의원 의장이 된 것은 시데하라가 처음이었다. (과거 귀족원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제1차 내각과 제2차 내각 사이에 의장을 맡았고, 고노에 후미마로는 의장 경험 후 총리가 된 사례가 있었으나,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시데하라 이후에는 총리 경험자가 의장이 된 경우는 없다.)
안보 분야에서는 재군비가 세계의 반발을 살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에는 존 포스터 덜레스 당시 미국 국무성 고문에게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 위험성과 재군비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들며 미군의 영구적인 일본 주둔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이 격화되자 제10회 국회 개회식 의장 연설에서 자위권 발동 가능성을 언급하는 초고를 준비하기도 했다. 나카지마 야단지에 따르면, 이 무렵 시데하라의 재군비에 대한 생각은 아시다 히토시와 요시다 시게루의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1951년 3월 10일, 중의원 의장으로 재직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20][21] 향년 80세였다. 의장 재임 중 사망했기 때문에 장례식은 중의원장으로 거행되었다.[22] 묘소는 도쿄도 도시마구 고마고메의 소메이 영원이다.
3. 시데하라 외교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처음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와카쓰키 레이지로(1차),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2차) 내각에 이르기까지 헌정회 및 입헌민정당 내각 하에서 외무대신직을 수행했다.
시데하라가 1920년대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추진한 국제 협조 노선을 '시데하라 외교'라고 부른다. 이는 워싱턴 체제에 기반하여 미국, 영국 등 열강과의 협조를 중시하고, 민족 운동이 고조되던 중국에 대해서는 내정 불간섭과 조약상 권익 옹호에 집중하며, 동아시아에서 일본 중심의 안정적 질서 형성을 목표로 했다. 이는 군비 확장과 자주 노선을 추구했던 다나카 외교와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국회 첫 연설에서는 국제연맹의 원칙 준수를 약속하기도 했다.
1925년 베이징 관세 회의에서는 중국의 관세 자주권 요구에 대한 합의를 추진했으며, 같은 해 5·30 사건 당시에는 중국 내 일본계 공장 파업에 대해 봉천군벌의 장쭤린에게 요청하여 무력 진압하는 등 조약상의 권익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26년 장제스의 북벌에 대해서는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1927년 난징 사건 발생 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외국 영사관과 거류지를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열강들의 보복적 최후통첩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국 정책은 군부와 정우회의 불만을 샀으며, 우가키 가즈나리 육군대신 등 내각 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는 1927년 4월 와카쓰키 내각 붕괴의 한 요인이 되었다.
1929년 외무대신으로 복귀한 시데하라는 중국에 대한 비간섭 정책을 재개하고 난징의 장제스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 이후, 군부 세력은 시데하라 외교가 국가를 약화시킨다며 '연약 외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1931년 여름, 광저우 국민 정부의 외교부장 천유런이 만주를 일본이 임명하는 정권 하에 두고 중국은 간접적 종주권만 갖자는 제안을 했으나, 시데하라는 이를 일축했다.[7][8]
그러나 1931년 9월, 관동군이 중앙 정부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 점령하면서 중국 비간섭 정책은 파탄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수습에 실패하면서 시데하라 외교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고, 이는 문민 외교의 종식이자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군부가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1931년 10월, 시데하라는 "평화와 전쟁의 일본인"이라는 부제와 함께 ''타임'' 지 표지에 등장했다.[4]
4. 일본국 헌법 제정과 9조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이 항복한 뒤, 시데하라 기주로는 1945년 10월 9일부터 1946년 5월 22일까지 전후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10] 그는 일본 진보당 총재직도 겸임했다. 시데하라 내각은 맥아더 장군의 지침에 따라 새 일본국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이 초안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거부되었다.
특히 헌법 제9조의 전쟁 포기 조항의 발안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시데하라 본인은 1951년 출간된 회고록 《외교 50년》(外交五十年)에서 자신이 9조의 발안자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들은 후 전차 안에서 본 광경을 계기로 '전쟁을 포기하고 군비를 전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세계 인류(sekai jinrui)와 함께 전쟁 없는 세상(sensō naki sekai)을 만들어 갑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훗날 맥아더 역시 9조는 시데하라의 제안이었다고 증언했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24일 시데하라와의 회담(페니실린 회담)에서 시데하라가 전쟁 포기를 포함한 새 헌법 제정을 제안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14] 시데하라가 오오히라 코마즈치(大平駒槌)에게 이야기한 내용(하무로 메모)에 따르면, 시데하라는 이 회담에서 "전쟁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없다", "전쟁 포기를 세계에 명확히 선언하는 것만이 일본이 신뢰받는 길"이라고 말했고 맥아더가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데하라 내각의 각료였던 마쓰모토 조지, 아시다 히토시를 비롯해 기우치 시로 내각 부서기관장, 마스다 고시치, 오시야 토미조 등 정치인들과 시데하라의 아들 시데하라 미치타로 등은 시데하라의 발안설을 부정했다. GHQ 민정국 차장 찰스 L. 케이디스는 1월 24일 회담의 주제가 공직 추방에 관한 것이었다고 회상했으며, 설령 시데하라가 '하무로 메모'처럼 말했다 해도, 이는 '선언'에 그쳤을 뿐 헌법에 전력 불보유까지 명기하자는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다.[14][15]
시데하라는 처음에는 천황제 유지를 위해 헌법 개정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1946년 1월 30일, 정부안인 마쓰모토 시안(松本試案) 검토 시 시데하라는 군 관련 조항 삭제를 요구했지만, 이는 "지금 넣는 것은 자극이 강하다", "GHQ와의 협상 지연" 등 협상 전략 차원이었으며 장래의 군대 보유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2월 13일, GHQ가 마쓰모토 시안을 거부하고 전쟁 포기 조항이 담긴 맥아더 초안을 제시했을 때, 시데하라의 비서였던 기시쿠라 마쓰는 "시데하라 수상도 매우 놀란 것 같았다"고 증언하여, 시데하라가 헌법에 해당 조항이 포함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음을 시사했다.[14] 2월 21일 맥아더와의 회담에서는 주권재민 명문화에 난색을 표하며 전쟁 포기 조항에 대해서도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도 없는 이례적인 이야기"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맥아더가 "일본이 도덕적 지도력을 쥐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시데하라는 "리더십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추종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양보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며 수용을 압박했다. 결국 2월 22일 GHQ 초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기로 각의에서 결정되었는데, 시데하라는 3월 15일 각의에서 "천황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사령부 측 제안을 수락했다"고 말해, 천황제 유지가 주된 동기였음을 시사했다.
역사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구세키 쇼이치, 후카세 다다카즈, 가와카미 아키히로, 가사하라 주쿠지 등은 시데하라 발안설 또는 주도설을 지지하는 반면, 사사키 다카시, 이오키베 마코토 등은 시데하라의 제안이 부전 조약 수준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데하라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요시다 시게루나 시데하라의 비서 기시쿠라 마쓰, 사토 다쓰오 법제국 차장 등은 시데하라가 평소 생각해온 비전 사상을 맥아더에게 이야기했고, 맥아더가 그것에 공감함으로써 9조가 탄생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최근 시데하라 평전을 쓴 구마모토 후미오와 다네이나 히데지는 시데하라 발안설을 부정하지만, 가사하라 주쿠지는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
시데하라의 비서를 자처한 히라노 사부로 중의원 의원이 1963년 내각 헌법조사회에 제출한 '히라노 문서'도 논란거리다. 이 문서는 시데하라가 1951년 2월 하순에 자신에게 9조 발상의 배경(원자폭탄 등)을 설명했다고 주장하지만, 문서의 원본 메모 부재, 당시 시데하라의 건강 상태, 내용상 모순 등으로 인해 사사키 다카시, 나카무라 가쓰아키, 다네이나 히데지 등은 창작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한다. 반면 가사하라 주쿠지는 문서의 신빙성을 옹호한다.
시데하라 본인도 회고록 《외교 50년》이 기자의 질문에 구술한 것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고 발표한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지인에게는 "승자의 의심과 탄압을 완화시키기 위한 슬픈 수단"으로 본심과 다르게 썼다고 토로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회고록 내용과 모순되는 시데하라 자신의 발언들(GHQ 직원 해리 에머슨 와일즈에게 "전쟁 포기 조항을 보고 놀랐다", "취지를 맥아더에게 말했지만, 헌법에 넣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2월 21일 맥아더에게 "어떤 군대라면 보유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15], 측근에게 "전쟁 포기는 나로부터 바랐던 것으로 하자"고 말했다는 증언[17] 등)이 다수 존재한다.
맥아더가 시데하라 발안설을 주장하기 시작한 시점이 한국 전쟁 발발 이후라는 점에서, 일본 재군비 필요성이 대두되자 책임 회피를 위해 시데하라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사사키 다카오, 고바야시 나오키 등). 맥아더의 최측근이었던 코트니 휘트니 역시 처음에는 맥아더를 발안자('Our Old Man')로 지칭하다가 한국 전쟁 이후 시데하라('Your Old Man')로 바꾸었다는 증언(프랭크 리조)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일본 헌법 제9조의 발안자를 둘러싼 논쟁은 관련자들의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 해석의 차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5. 평가 및 유산
시데하라 기주로는 국제 협조와 평화주의를 지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외교 정책은 '시데하라 외교'로 불리며, 전전 일본 자유주의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혼란기에 총리로 임명되어 일본의 재건 과정에 참여했다.
전후 총리 임명과 헌법 제정1945년 일본 항복 당시 반 은퇴 상태였으나, 친미적인 평판 덕분에 1945년 10월 9일 전후 초대 총리로 임명되어 1946년 5월 22일까지 재임했다.[10] 당시 일본 진보당의 총재직도 맡았다. 본인은 총리직을 고사하려 했으나, 요시다 시게루의 격려와[11] 쇼와 천황의 직접적인 설득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총리로서 시데하라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초안은 GHQ에 의해 거부되었다. 시데하라 본인은 자신의 회고록 『외교 50년』(外交五十年|가이코 고주넨일본어, 1951)에서 일본국 헌법 제9조(전쟁 포기 조항)를 자신이 처음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도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며,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부터 국제법과 헌법에서 '전쟁 금지' 개념에 관심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세계 인류(世界人類|세카이 진루이일본어)와 함께 전쟁 없는 세상(戦争なき世界|센소 나키 세카이일본어)을 만들어 갑시다"라는 그의 말은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1945년 10월 11일 맥아더와의 첫 회담에서도 헌법 개정, 인권 확보, 민생 안정 등에 대한 요구를 받았다.[12][13]
정치 활동과 노선그의 보수적인 경제 정책과 미쓰비시 재벌과의 가족적 유대는 당시 좌파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46년 4월, 구 헌법 하의 마지막이자 전후 최초의 총선거인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이 제1당이 되자 시데하라 내각은 총사퇴했고, 요시다 시게루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시데하라는 제1차 요시다 내각에 무임소 국무대신으로 입각하여 잠시 복원청 총재를 겸임하기도 했다.
1947년의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 후[18] 일본 진보당 총재로서 민주당 결성에 참여했으나, 이후 카타야마 데쓰 내각의 사회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다나카 각에이, 하라 겐자부로, 혼마 슌이치, 나카야마 마사, 고다이라 히사오 등 시데하라파의 젊은 의원들과 함께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이후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19] 총리 경험자로는 처음으로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
안보관과 말년안보 문제에 있어서 시데하라는 재군비가 국제 사회의 반발을 살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1950년에는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에게 공산주의 침략 위협과 재군비의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들며 미군의 일본 영구 주둔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격화되자 제10회 국회 의장 인사에서 자위권 발동 문제를 언급하는 연설 초고를 준비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재군비에 대한 입장은 아시다 히토시와 요시다 시게루의 중간 정도로 평가된다.
시데하라는 중의원 의장 재임 중이던 1951년 3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20][21] 향년 78세였다. 장례는 중의원장으로 치러졌으며[22], 도쿄도 도시마구 고마고메의 소메이 영원에 안장되었다.
유산시데하라 기주로는 '시데하라 외교'로 상징되는 평화 협조 노선과 일본국 헌법 제9조 제정에 기여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전후 일본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보수적인 경제 정책과 재벌과의 관계, 그리고 헌법 9조 발안자 논란 등은 비판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6. 가족 및 친족
幣原 九市郎일본어
幣原 新治郎일본어
幣原 坦일본어
幣原 節일본어
幣原 雅子일본어
幣原 道太郎일본어
幣原 重夫일본어
幣原 平三일본어
加藤 高明일본어
岩崎 久弥일본어
木内 重四郎일본어
渋沢 敬三일본어
古在 由秀일본어
古在 由重일본어